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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해무] 그 배에 올라탄 것들

 

 

해무

 

그 배에 올라탄 것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음.

 

무언가로 가려진 곳에서 인간의 욕망과 본능은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 아래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인간의 시야가 판단할 때 가려진 조건이라면 인간은 목적을 향한 욕망과 본능을 앞세운다. 어둠 속에서, 안개 속에서 인간은 마치 아무도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리라 안도하며 그렇게 빛 아래에선 드러내지 못했을 짐승을 끄집어내는지도 모르겠다.

<해무>는 각자 목적과 명분을 갖고 '전진호'에 승선한 사람들의 욕망과 본능이 검푸른 바다의 어둠과 희미한 안개에 둘러싸였을 때 폭발하면서 살육의 난장이 펼쳐지는 현장을 묘사한다. 어둠과 안개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 그 배에 올라탄 것들을 어둠 속 관객들의 살에 짓이겨 바르듯 들이민다.

 

 

 

명확한 캐릭터가 이끄는 이야기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떠난 뱃사람들이 배 위에서 하는 모든 생활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뱃사람들의 생활에 관객을 빠르게 몰입시킨다. 바다의 짠 내음과 고기의 비린내를 입고 사는 뱃사람들이 주인공이라는 설명을 간결하고 인상적으로 보여준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 하다. 곧바로 전진호 선원들의 캐릭터를 하나 둘씩 명확하게 띄우는데 이는 관객에게 선원들을 알게 하고 그들이 겪을 일을 지켜보게 하면서 클라이막스에 폭발하는 그들의 욕망과 본능을 목도하게 만드는 것을 최대 목표로 둔 설정처럼 보인다.

 

 

 

선장 철주(김윤석)는 마치 전진호와 한 몸인 듯한 사람이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본 것이 외간 남자와 외도하는 아내의 모습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그러면서 그가 자리하는 곳은 다시 전진호 선장실이다. 그는 오로지 전진호를 지켜내고 유지하는 것에 온 생을 건 듯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밀항자를 운반하는 일도 하게 된다. 만선의 수확을 거두지 못하며 감척 사업 대상이 되자 전진호를 지키려고 수협에서 자금 상단을 받던 모습이 그대로 밀항 브로커와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은 절박한 상황을 표현한다. 그에게 돈이 필요한 것도, 밀항자를 운반하는 일을 하는 것도, 선장으로서 폭력적인 권위를 휘두르는 것도 모두 배를 지키기 위함이다. 결국 전진호와 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선원들을 압도하던 힘이 클라이막스에서 빠진 듯 보이는 것도 전진호의 기운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진호의 막내 동식(박유천)은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순한 인물처럼 보인다. 이제 뱃일을 조금씩 익혀가는 듯한 그는 순수한 인간애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를 통해 사랑과 희생의 가치가 전진호에 실리게 된다. 동식이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홍매일 뿐이다. 그는 그녀를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쏟는다. 마치 <노틀담의 꼽추>에서 콰지모도의 에스메랄다를 향한 끌림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해무>에서 동식을 통해 보게 된다.  

 

 

 

홍매(한예리)는 서울에 산다는 오빠를 찾아 밀항한다. 그녀는 진짜 혈육인 '오빠'를 찾는다고 하지만 그게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강한 생존력은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에서 뿜어져 나온다. 홍매라는 이름과 입고 있는 붉은 치마처럼 강렬한 인상이 있지만 전진호를 감싸는 안개처럼 뭔가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는 여인이다. 나는 전진호 밀항자들의 참극을 만든 것은 홍매가 기관실에서 저지른 의도치 않은 작은 실수라고 추측한다. 의도치 않게 엄청난 결과를 만들고 말았으나 (그녀 포함) 누구도 그것이 원인이었으리라 짐작하지 못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늘 동식의 도움을 받지만 동식의 도움 없이도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지막 그녀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해 봐도 그녀는 진정 생존력이 강했고 그것이 그녀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그녀의 목적이었을 것 같다.

 

 

 

기관장 완호(문성근)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수배를 피해 배에 숨어 지낸다. 그도 언젠가 당당히 배 밖으로 나가 딸을 만날 꿈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족 사진을 품고 있는 소학교 교사 출신 밀항자 오남(정인기)에 공감하고 동일시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 사무친 감정은 그의 광기를 끌어내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만들어낸다.

 

 

 

마치 부선장처럼 선장의 명령을 다른 선원들에게 전하고 솔선하는 갑판장 호영(김상호), 돈과 여자에 집착하는 경구(유승목),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대상을 찾아내는 본능에 충실한 창욱(이희준) 등 전진호에 승선한 선원들 각자의 목적과 욕망, 본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밀항자를 싣고 감시의 눈을 피하던 중 이 배에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그 모든 것을 감추라는 듯 어둠과 해무가 전진호를 감싼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겪고 싶지 않은 처참한 일들이 배 위에서 철철 피를 흘리듯 쏟아져 나온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해무가 짙어질수록 이들의 신경은 극에 달하도록 날카로워지고 이제 이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오로지 원하는 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분출된다. 그리고 그 분출은 모두를 처참한 결과에 이르게 만든다.

 

 

돈이 동력이 되고 해무가 부추긴 피비린내 나는 참극

 

 

전진호에 승선한 사람들의 욕망과 본능의 동력은 돈이다. 때는 1998 10, IMF 관리 상황에 처한 나라는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고 돈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만선의 꿈을 가졌다는 선원들에게 역시 돈이 절실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결국 돈은 그들이 비극을 향해 가도록 만든 동력이 되었고 해무는 그들에게 돈이 가리키는 목적지를 향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선원들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처참하고 끔찍한 일들이 배 위에서 벌어지고 누군가는 희생당했고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이야기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메시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고 한다면 <해무>는 사랑과 희생 정신이 돈과 욕망에 우선해야 함을 말하는 듯 하다. 결국 돈이 몰아세운 벼랑 끝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지키고 지향해야 할 가치는 사랑과 희생 정신, 그 무결한 순수함에 있다는 것 말이다.

 

 

 

영화의 엔딩은 어쩌면 아직 해무가 가시지 않은 것처럼 명징하지 않다. 라면과 청양고추가 남긴 추억을 떠올리며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왜 그랬는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맴돈다. 엄청난 충격과 공포 속에서 서로 부둥켜 안으며 절절하게 사랑을 나눌 수 밖에 없었던 홍매와 동식, 그들은 남은 날들을 함께 하며 함께 했던 참극의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 나았을까, 문득문득 끔찍한 경험이 떠오르고 아련하게 그리울지언정 피차 참극의 기억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나았을까. 그런 생각들이 맴돈다. 이런 엔딩은 마치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다 그 일로부터 떠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다시 그 현장을 찾아갔던 엔딩을 떠올리게 한다. 박두만은 지긋지긋한 그 사건을 여전히 추적하며 그대로 살아가는 게 나았을까, 결코 잊을 수 없어 '추억'이 됐을지라도 그 일로부터 아예 손을 떼고 살아가는 게 나았을까. 둘 다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상대를 대상으로 어떻게든 지울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 하기엔 너무 끔찍하고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긴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