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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군도:민란의 시대] 그렇게 민란의 불이 지펴진 걸로

 

 

군도 : 민란의 시대

그렇게 민란의 불이 지펴진 걸로

 

 

 

의적단의 활약, 민중의 자화상

 

<군도:민란의 시대>는 서자라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만든 여러 제약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그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남자와 그런 악의에 의해 희생된 민중 사이에 나타난 저항세력의 대립을 다루는 영화다. 타고난 운명을 바꾸려고 살생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과 그런 인물의 설계에 놀아나는 시대에 맞서 싸우는 의적의 대립이다. 영화의 서두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1860년대 철종의 조선을 곳곳에서 부패한 정치인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민란이 일어났던 시대로 설명하긴 하나 영화에서 다뤄지는 나주 지역의 민란은 민중의 봉기라기 보다는 앞서 나간 의적단의 활약으로 비춰진다. 갖가지 불공정한 처사와 폭력에 피해자이기만 했던 민중이 결국 꿈틀하며 저항하게 되는 단서를 마련하기는 하나 그것보다는 의적의 활약이 핵심이다 민란의 시대이긴 하지만 의적들의 활약만이 눈부시고 민중은 무기력한 채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헤드카피인 '망할 세상, 백성을 구하라'에서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민중 스스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할 영웅 같은 누군가가 등장한다는 힌트이고 그것이 곧 의적단 '지리산 추설'인 것이다. 어쨌든 거대한 민중봉기를 통해 통쾌한 한방을 보기를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실망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저항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현 민중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쁜 놈들의 전성 시대는 곧 민란을 불러일으키는 시대

 

탐관오리 조원숙(송영창)이 기생 사이에서 얻어낸 조윤(강동원). 아들이 귀한 집안인지라 본가에 들어와 지내며 후계자로 키워지는 듯 했으나 조원숙의 본처는 끝내 아들을 낳아 서자인 조윤을 불안하게 만든다. 서자였기에 정계 진출이나 사회적 지위 획득에 모두 어려움을 겪었고 집안의 후계자에서도 밀려날 것을 걱정한 조윤은 이른 나이에 무예를 익히고 지략을 갖췄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살생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조선의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로 성장한다. 조윤의 힘과 지략은 결국 정계와 결탁해 나주 지역 전체를 휘어잡고 민중의 재산을 갈취하는 악행이 판을 친다.

윤종빈 감독의 전작인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스스로가 최씨 집안의 이름을 세우겠다는 남자 최익현(최민식)의 이야기다. 타고난 족보가 아니라 자본과 힘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가 성공하기 위해 혈연을 이용하는 것이 흥미롭게 다뤄졌던 영화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점과 그를 통해 자신이 가문의 주역 또는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과 <군도>의 조윤은 닮은 구석이 있다. 얼핏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라 함은 돌려 말하면 나쁜 놈들의 행패에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킬 선한 시민들, 즉 민란을 일으킬 자들의 등장을 부르는 시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윤종빈 감독의 두 영화는 닮은 듯 대칭하는 데칼코마니 같은 인상을 받았다.

 

 

 

민중봉기는 없다, 그 시작을 가늠하게 할 뿐

 

사이코패스 같은 조윤과 결탁한 정치 세력에 맞서는 자들은 의적단인 '지리산 추설'이다. 각각 지략과 무술 실력을 갖춘 자들의 집합인데 관과 정계에 몸 담았으나 그 추한 꼴을 견디지 못해 정의의 편에 서겠다고 나선 이도 있고 타고난 신분으로 인해 차별 받는 처사에 분노하며 가담한 자도 있고 관의 행패와 부당함에 억울함과 분노로 복수의 칼을 갈며 가담한 자도 있다. 이들은 전략을 세워 공격할 대상에 접근하고 이를 멋지게 성공시킨다. 변장과 위조, 잠입, 함정 등 이들이 만들어놓은 전략과 수행 방식은 볼 만 하다. 이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부패한 세력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하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들은 백성들을 모아 함께 맞서자는 운동가는 아니다. 그저 의적으로서 하나하나 자신들의 할 일을 해나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다. 따라서 영화의 부제인 '민란의 시대'에서 예상했을 민중봉기는 이 영화 속에 없다. 백성의 일부가 의적단이 되어 활약을 펼치지만 민중봉기가 준비되어있지는 않다. 이에 예상했던 영화의 흐름이나 클라이막스가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아 뭔가 심심하다는 인상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는 최소한 '민란의 시작'을 가늠하게 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중반부에 조윤은 나주 땅을 개척하는 작업을 벌인다. 이에 의적단의 지휘자인 땡추(이경영)는 그 길을 지나다 이 땅은 염분이 많으니 그냥 두는 게 더 낫다는 조언을 한다. 이에 조윤은 그냥 시험 삼아 하는 작업이라는 식의 대답과 함께 땡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롱한다. 이 장면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대목이 MB 4대강 사업이다. 국내외 환경단체에서 우려를 표명했고 국민적 반대가 있었음에도 갈아 엎어버렸고 그것이 그대로 환경의 파괴라는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4대강 사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군도:민란의 시대>는 이런 장면을 비롯한 설정들이 권력을 지닌 자들의 횡포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국민이 피해를 보는 상황들을 담고 있고, 1860년대 철종의 조선으로 그려진 모습을 통해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민중봉기를 담고 있지 않다. 사악한 개인과 그와 결탁한 정치인에 의해 국민의 삶이 피폐해졌음에도 선뜻 저항의 힘을 모으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영화 속 백성들의 모습은 많은 비리와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피해자가 속출함에도 봉기하지 않는 현재 나의 모습을 보는 듯 뜨끔하다. 조윤은 자신을 둘러싼 민중을 향해 외친다.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어본 자의 칼이라면 맞서주마." 그 말에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악을 행했을지언정 조윤은 스스로의 행위를 서자라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조윤의 그 말은 운명이라는 것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자극하는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여태껏 핍박과 착취의 피해가 자신의 팔자겠거니 순응하며 살았던 자들은 마지막 찔러 넣은 한방의 창으로 '운명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어보는' 일을 시도하는 발걸음을 뗀 것이 아닐까. 조윤의 말은 결국 민란의 기운을 당기는 역할이라고 볼 만 한데, 이를 더 직접적으로 불러일으킨 대사는 이태기(조진웅)가 외치는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 이다. 뭉쳐서 저항하라는 것, 민중의 봉기가 필요함을 외치는 한마디는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기에 클라이막스에 큰 쾌감을 주는 데는 역부족으로 보이지만 결국 민란의 서막을 부르는,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동시에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된다는 면에서 뭉쳐서 저항하라는 메시지는 고스란히 관객에게 던져지는 말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민중봉기가 영화 속에서 짜릿하게 펼쳐지지 않아 심심하긴 하지만 그 민란은 이제 영화 속에서나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나 일어날 때임을 알리는 것이다. 지평선에 지는 태양을 향해 쉼 없이 말을 달리는 의적 무리와 스파게티 웨스턴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멜로디가 장식하는 엔딩은 그런 의미에서 불을 지피는 엔딩이라고 여겨진다.

 

 

 

무협 활극은 스파게티 웨스턴식 리듬을 타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선과 악의 대립, 의적단의 합을 맞춘 듯 전략적인 행보, 경쾌한 음악 등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나 중국 무협 영화의 장면과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사이사이 대사로 만들어지는 유머는 영상에 색 보정 하듯 영화의 톤을 한층 가볍게 조절한다.

플래시 백을 사용할 수도 있었음에도 플롯을 시간 순서대로 펼치느라 1(영화는 총5장의 구성)의 제목 '지리산 추설'이 등장하고 영화가 진행된 다음에 오프닝 타이틀과 캐릭터 타이틀을 등장시켜 정리 안 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이사이 내레이션이 상황을 (길다 싶을 정도로) 설명하는 것도 낯설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도 다시 생각해보면 좀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었던 의도로 읽히고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모양새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이왕 이렇게 만들어졌다면 마지막 말을 달리는 장면에서도 '이렇게 민란에 불이 지펴졌다'는 식의 상황을 정리하는 내레이션이 들어갔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걸 또 과잉 친절이라고 뺐을 지도 모르겠다만. 

 

 

 

강동원 "살아있네!"

 

틱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는 도치의 행동을 표현한 하정우의 연기도 좋았으나 영화에서 시선을 잡아 끄는 역할은 조윤을 연기한 강동원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날이 선 눈빛과 얼굴과 몸의 선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화면에 펼쳐내는데 꽤 섬뜩하게 보여지는 순간이 있다. 싸움 도중 상투가 잘려 머리가 풀리는 장면에선 얼핏 남장여인의 고운 선과 귀신 같은 서늘함까지 느껴져 <동방불패>의 임청하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간의 뭉툭해 보였던 연기에 좀 더 힘을 싣고 날을 세운 강동원의 연기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복귀라고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