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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런치박스] 잘못 배달된 도시락이 데려다 준 삶의 어디쯤

 

 

런치박스

잘못 배달된 도시락이 데려다 준 삶의 어디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일라(님랏 카우르)는 정성스레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한다. 윗집 아주머니에게 특급 레시피를 받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만드는 것 같다. '이 도시락을 먹고 남편이 좀 달라지게 해주세요.' 점심마다 가정에서 직장으로 도시락을 운반해주는 대형 인력 시스템을 갖춘 인도의 뭄바이. 그 인력을 통해 도시락은 각자의 자리로 전달된다.

아내와 사별했고 이젠 정년퇴직을 앞둔 사잔(이르판 칸). 도시락을 챙겨 줄 사람이 없어서 동네 레스토랑에 도시락 배달 서비스를 신청해서 먹고 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의 책상 앞에 도착한 도시락. 그런데 맛은 그 날 따라 특별하다. 잃어버렸던 에너지를 일깨우는 듯한 맛에 점심이 기다려진다.

일라가 정성스레 준비한 도시락은 (하버드 출신 사람이 감수했고, 영국 왕실에서도 감탄했다는) 인도의 도시락 배달 시스템을 통해 완벽하게 '잘못' 배달됐다. 남편이 아닌 사잔에게로. 그 잘못된 도시락 배달을 계기로 둘은 소소하게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처음엔 '음식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 '오늘은 좀 짰다' 등의 음식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했으나 그 쪽지는 차차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고 교감하는 수단이 된다. 잘못 배달된 도시락은 두 사람의 인생을 어디로 데려갈까?

 

 

 

<런치박스>는 인도의 거대 도시락 배달 인력 시스템에 신기한 감탄을 하게 만들고, 그 시스템 하에서 잘못 배달된 도시락을 통해 남모르던 두 남녀가 쪽지를 주고 받게 되는 사이가 되는 모습으로 천천히 흐른다. 도시락은 단지 이 둘을 소통하게 하기 위한 극적 소재 역할을 할 뿐이다.

무심하던 남편의 외도 낌새까지 발견하게 되면서 삶의 낙을 잃어버린 일라와 아내와의 사별과 퇴직을 앞둔 노년으로 새로운 희망이 없을 것 같이 느끼는 사잔은 도시락 통에 담긴 쪽지를 통해 제2의 삶에 대한 희망,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였다면 이 흐름이 순탄하게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두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상흔과 각자의 처지가 만만치 않다.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영화는 천천히 두 사람의 교감을 스크린에 띄운다. 속속들이 두 사람의 감정에 몰입하게 하는 데 서두름이 없다. 두 인물이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음악이나 소품 등의 자연스런 연결로 관객에게 섬세하게 전달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사잔이 탄 통근 열차에서 꼬마들이 부르는 노래는 다음 장면에서는 부엌에서 일라가 듣는 노래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일라가 바라보는 침실의 팬은 다음 장면에서는 사잔이 바라보는 식당의 팬으로 옮겨진다. 사잔이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된 쪽지를 본 후 일라가 듣는 영화 <사잔>의 주제곡은 통근 열차 속 사잔이 듣는 꼬마들의 노래로 이어진다. 일라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순간 사잔은 후임 직원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감정의 출발점과 도착점, 이끌고 이끌리는 그 차이에 따라서 연결 장면 속 소재의 출발점과 시작점도 다르게 연출한 섬세함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쪽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염려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직접적인 만남, 그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그 순간에 덜컹거림이 찾아온다. 면도를 하기 위해 들어간 욕실에서 사잔은 자신의 할아버지 냄새를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할아버지가 아닌 자기 자신의 냄새였다는 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늙음의 자각, 그것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를 접어 넣게 만든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한다.

일라는 새로운 삶의 활기에 설렌다. 하지만 그 기대에 상처를 입은 후 감정은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던 중 오랜 투병 중이던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사잔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떠나버렸다.

뭔가 서로 통할 것 같은 두 사람이 잘 될 것 같이 흐르다 각자의 삶에 끼어든 자각, 사건 등으로 덜컹거린다. 덜컹덜컹 거리면서 생각을 깨우고 생각에 빠지게 하는 기차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덜컹거림 속에서도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잘못 탄 기차도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잘못 도착한 도시락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교감이 그들 각자를 어떤 목적지에 데려다 줄 지 끝까지 주목하라는 영화적 암시와도 같다.

 

 

흥겨운 노래와 춤사위가 없는 보기 드문 인도 영화의 모습이다. 미세하게 돌고 도는 두 사람의 입장의 변화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음악과 춤을 타고 내러티브도 껑충 뛰어버리는 헐거움이 아니라 꼼꼼하게 감정을 담고 변화를 포착해내는 섬세함을 택한 듯 하다.

대신 영화 속 사운드가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덜컹거리는 통근열차 소리, 돌아가는 팬의 소리, 도시락 배달부들의 노동요가 흐르는 흔들리는 트럭 안의 소리는 그들 삶을 이끌고 흔들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된다.

젊은 주인공들을 앞세운 영화라면 그런 덜컹이는 소리에도 패기가 실리겠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 소리는 인물들의 상황에 맞게 뛰는 맥박과 같다. 늙었지만, 이미 흘러갈 대로 흘러간 인생이지만 여전히 뛰는 맥박으로 앞으로 향하고 있다. '어제의 로또는 사지 않는' 머물지 않고 앞으로 가는 인생이다.

 

낯선 두 사람이 우연히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감한다는 면에서 영화 <접속><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등의 작품이 연상된다. 그러나 젊은 기운이 빠진, 인생을 좀 살아낸 사람들의 입장에서 벌어지는 이 영화의 울림은 꽤 다르고 상당하다. 그들의 맥이 뛰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전달하는 섬세한 연출과 연기가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