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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가화만사성은 만고의 진리, 그러나 답은 정말 모르겠다는, 아! 가족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

August : Osage County

 

가화만사성은 만고의 진리,

그러나 답은 정말 모르겠다는, ! 가족

 

베벌리(샘 쉐퍼드)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시인이다. 구강암에 걸린데다 약물 중독에 빠진 아내 바이올렛(메릴 스트립)과 함께 오세이지 카운티에 살고 있다. 바이올렛을 돌보고 집안일을 담당할 조나(미스티 업햄)에게 '인생은 너무 길다' T.S.엘리엇의 말을 인용하며 삶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베벌리, 그러나 며칠 뒤 쪽지를 남기고 사라지고 자살로 추정되는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에 오세이지 카운티로 딸들과 가족들이 모여든다. 바이올렛의 동생인 메티 페(마고 마틴데일)와 그의 남편 찰스(크리스 쿠퍼)가 찾아오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큰 기대를 품게 했던 첫째 딸 바바라(줄리아 로버츠)는 어린 여자와 바람 나 별거 중인 남편 빌(유완 맥그리거), 딸 진(에비게일 브레슬린)과 함께 부모의 집으로 온다. 인근에 살며 부모를 돌보는 일을 담당했던 둘째 딸 아이비(줄리안 니콜슨)는 이종사촌인 리틀 찰스(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비밀리에 연애를 한다. 플로리다에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셋째 딸 캐런(줄리엣 루이스)은 역시 분방한 사업가이자 약혼자인 스티브(더못 멀로니)와 함께 나타난다. 그런데 베벌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가족의 모임은 이내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고 충돌하는 격전의 장으로 돌변한다. 오세이지 카운티에 다시 모인 가족들은 그간 숨겨왔던 비밀과 마음 속에 담았던 모든 불만들을 폭발시키며 8월의 더운 기운 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다.

 

 

<어거스트:가족의 초상>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을 것만 같은 징글징글한 가족의 초상을 보여준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간에 피할 수 없는 갈등과 몰이해, 타인에게보다 더 지나치게 가해지는 독설과 그로 인한 상처,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외면하고 넘어갔던 진실 등 모든 가족들이 품고 있을 문제들에 대해 거리낌없이 쏟아낸다.

 

영화의 원제는 August: Osage County (8: 오세이지 카운티)로 배경이 되는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오세이지 카운티'에 모인 가족들이 보내는 더운 8월의 이야기를 나타낸다. 원제에 등장하는 지명인 '오세이지 카운티'는 오세이지 인디언 보호구역이 현존하는 원주민들의 지역이다. 지명이 영화 제목에 들어갔을 만큼 지역이 갖는 의미가 있다. 부모 세대에겐 힘들게 정착해서 다진 지역이고 자식 세대에겐 벗어나고픈 촌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입장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갈등을 축적하는 근원이 된다.

영화 속에서 바바라가 '이 덥고 황량한 벌판에 살겠다고 침략해서 땅을 뺐었다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디언 원주민들의 땅을 개척자들의 이름으로 차지한 영역이다. 개척이라는 이름의 침략 하에 그 곳에 정착하기로 한 삶이 순탄했을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다. 바이올렛은 장례 후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세대는 거친 양부에 의해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아 머리가 함몰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고, 가난에 찌들어 온 가족이 몇 년 동안 차 안에서 생활을 했던 세대라며 그걸 모르는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행복에 겨운 줄 알라고 말한다. 그것으로 부모 세대인 바이올렛의 세대가 겪었을 삶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어려운 삶을 살아온 이전 세대와 그들의 자손들은 이해가 상충할 수 밖에 없다. 이전 세대는 그들의 고생을 늘어놓으면서 인정받고 싶겠지만 자손들은 그것을 허풍이나 잔소리로 여길 뿐이다. 집안일을 돌보기 위해 고용된 원주민 혈통의 조나를 보면서 바이올렛은 '인디언'이라고 하면서 하대하고 바바라는 '인디언'이 아니라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이런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잡아먹을 듯 교정하고 잘났다며 비아냥거리는 모양은 두 세대 사이에 누적된 깊은 골을 눈치 채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한편 채식을 한다는 어린 손녀 진의 식습관은 고기가 없어 못 먹었던 기성 세대에겐 이해할 수 없는 놀림거리일 뿐이다. 이전 세대가 볼 때 현 세대는 윤택한 삶의 혜택을 받아 분에 겨운 사람들로 보인다. 자식을 길러내기 위해 그들이 쏟았던 사랑과 희생은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답답해하며 제 잘난 맛에 떠났던 자식들은 그들 마음 한 켠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래서 떠났던 자식들이 떠안게 된 불행과 실패를 보고 다독이지 못하고 오히려 독설로 일침을 놓는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에 사는 자식들에 대한 시기나 질투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자식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 고함으로 튀어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활고에 허덕였고 그렇게 얻은 사회적 명성이 있으나 과거에 얻은 상흔이 가시지 않아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이전 세대와 그런 세대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 세대의 갈등은 여기나 거기나 끝없이 이어지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가족이란 혈연관계 속에서도 각자의 삶의 방식과 각자가 겪어온 삶의 배경이 다르고 혈연이 주는 사랑보다는 각자의 이해 관계를 우선순위에 두는 세상이다 보니 가족 또한 끝없이 분열이 일어난다. 영화는 '오세이지 카운티'라는 특정 지역에 근거를 둔 가족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그들만의 남다른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가 되면 온갖 콩가루 막장 가족 드라마의 요소들이 휘몰아친다. 영화 초반 베벌리가 인용한 T.S.엘리엇의 '인생은 매우 길다'는 표현은 영화를 보다 보면 저절로 "아이고, 너무 오래 살다 보니 별 꼴을 다 보게 되는구나."라는 한탄으로 바뀌어 들릴 정도다.   

이런 콩가루 막장의 모습들도 마치 힘든 시절을 살았던 기성 세대가 쌓은 퇴적물이 현 세대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인다. 불안정하고 이성적이지 못했던 세대의 아픔은 고스란히 이후 세대에게도 전이됐다

문득 부모의 사상과 생활 태도가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이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떠오르는 것은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작은 아씨들>이다. 가난하고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가 부재한 상태이지만 올곧은 사상과 따뜻한 성품으로 네 딸을 키워낸 <작은 아씨들>의 어머니의 모습과 가족의 풍경은 <어거스트:가족의 초상>의 어머니의 모습과 가족의 풍경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우리 영화 <고령화 가족>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결과적으로 가족이 평온하고 화목해야 만사가 형통한다는 건 분명하게 알겠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건 정말 어떻게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인지 막막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가족'이 국어사전에 어떻게 정의 됐는지 찾아봤다.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라고 설명됐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의 구성과 탄생의 조건에 대한 설명일 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징글징글한 연쇄와 벗어날 수 없는 매임, 애정과 애증이 공존하며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한 관계 등의 설명이 첨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영화 <행복한 사전> 속 사전 '대도해' 제작팀이 현대어 수집을 하면서 '가족'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렸다면 과연 어떻게 내렸을까 궁금해진다.

 

+.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알차게 채우는 것은 팔할 이상이 배우들의 연기다. 제 옷을 제대로 걸치고 보란듯이 연기해내는 배우들은 만족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연기에 기댄 부분이 많아 다소 넘친다는 인상을 남긴다. 메릴 스트립의 경우가 완벽을 넘어 과하다는 인상을 주고 줄리아 로버츠의 호흡은 참 좋았다. 오랜만에 줄리엣 루이스의 모습이 반가웠고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소심한 눈물과 노래하는 모습은 시선을 끈다.

원작 희곡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트레이시 렛츠가 시나리오를 담당했고 TV시리즈 <셰임리스>의 각본으로 막장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 존 웰스가 스크린에서 막장 콩가루 집안의 모습을 다시 연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