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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노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취향과 해석

 

 

노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취향과 해석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에 의해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악도 알게 되고 원죄를 끌어안고 그 대가를 치르며 살게 된 인간. 그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그들의 자손인 카인, 아벨, 셋으로부터 내려온 자손인 노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허물을 벗고 나온 뱀의 유혹처럼 언제나 도사리는 악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땅을 추잡하게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때문에 창조주는 40일 주야로 비를 내려 대홍수를 일으키고, 이에 모든 인류를 멸하고 동물 각 몇 쌍과 선택 받은 인간인 노아의 가족만을 남겨두기 위해 홍수를 견딜 수 있는 방주를 만들라는 계시를 노아에게 전한다. 방주를 만들고 신의 뜻대로 세상은 정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사이 파고드는 인간의 고뇌는 갈등을 만들어낸다.

 

 

함축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성경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겨오면서 붙인 살들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취향과 그것에 따른 해석의 결과물로 볼 수 있겠다.

신의 뜻을 받아 그대로 행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분명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계시를 받은 선택 받은 자로서 노아가 짊어진 무게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을 수 있다. 다른 인간들과의 갈등을 겪고 그런 갈등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해야 했을 노아의 고뇌는 성경이 담고 있지 않으나 분명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 <노아>는 인간의 고뇌, 정신적인 고통의 극단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감독이 자신의 그러한 취향을 성경 속 인물에 투과하여 해석해낸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해석은 세대를 거듭하고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욕망을 다시금 들춘다. 또한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신과의 대화(또는 메시지의 해석)와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아로노프스키가 전하는 <노아>는 그러니까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오면서 결론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생각거리를 끌어안게 만드는 영화다. 1억 달러 이상이 투입된 블럭버스터로서 만듦새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나 논리적이지 않고 성경을 왜곡했다는 의견 등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화두를 던진다는 점, 감독의 취향을 덧댄 해석으로 생각의 여지를 주는 작품으로 <노아>는 분명 개성 있는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지구가 대재앙 끝에 종말을 맞게 되는 여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주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인류가 최후를 맞지만 위기 끝에 간신히 살아남는 인류가 있고 그것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보여주며 결론을 맺는 경우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만든 <투모로우><2012>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노아>역시 그런 류의 영화로 분류될 법 했다. 투여된 제작비 규모도 그렇고 대홍수를 그려낸 시각적인 효과도 그렇다. 그러나 아로노프스키가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아담과 하와로부터 몇 천년 후이긴 하지만) 성경 속 초기 인류에 해당하는 '노아'를 선택했다는 것에서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노아의 방주'이야기는 그 옛날 인류가 대재앙으로 인해 종말을 맞았으나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의 효시와도 같다. 그렇게 재앙을 맞고 몇 명만이 살아남아 시작한 것을 현재 인류의 근원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지금 잘 살고 있느냐를 생각해본다면 결론은 희망적이지 않다. '인간이 세상을 피와 욕심으로 더럽게 망쳐놔서 신이 새롭게 세팅하기 위해서 대재앙의 벌을 내렸다. 그것이 노아의 방주 시대이든, 폼페이의 시대이든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렇다고 인간 세상이 달라졌나?'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노아>는 인류가 대재앙으로 인한 종말을 맞은 후 새롭게 시작된다고 해서 인간 세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는 건 헛된 일이라는 절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 영화 속에 심어둔 것이 인간의 탐욕스러움과 끊임없는 고뇌와 갈등이고 더 구체적으로 힘을 싣기 위해 인류의 거의 초기라 할 수 있는 노아 시대의 대재앙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 아닐까. "먼 옛날에도 대재앙과 새로운 시작이 있었는데 별 볼 일 없었어, 왠지 알아? 그게 인간이거든." 뭐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토피아적 결정 그러나 디스토피아적 결말

 

성경은 인간이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통해 원죄를 지니게 됐고 수치심을 갖게 됐고 그 대가로 노동의 삶과 출산의 고통을 안게 됐다고 했으나 본질적으로 인간이 태초부터 끊임없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선택과 결정, 망설임과 고민, 답을 찾는 혼란이 아닐까. 자연을 지배할 존재라는 자격이 오만으로 변질 되었고 그것이 인간들끼리도 서로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탐욕스러움을 갖게 했다. 선악과를 통해 얻은 원죄를 떠나 애초에 타고난 다양한 심리적 기제가 결국 인간을 고작 인간에 머물게 만드는 원초적인 결점 아닐까. 영화 속 노아 역시 그런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

 

노아(러셀 크로우)는 아내 나메(제니퍼 코넬리)에게 '당신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살인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도 저 탐욕스런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 라고 한다. 그 말 그대로 노아는 방주 안으로 자신의 혈육인 함(로건 레먼)을 안전하게 들이기 위해서 소녀의 죽음을 묵인했고 그것 때문에 함과 갈등을 빚는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신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는 인류 자체를 모두 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선택 받은 자신을 포함함 그 누구도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인간이 있는 유토피아란 과연 가능할까? <노아>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염세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결국 샘(더글러스 부스)과 일라(엠마 왓슨)의 자손을 죽이지 못한 노아는 신의 뜻을 어겼다는 자책에 시달리며 술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새로운 희망,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창조주에게 감사의 제를 올린다. 성경에는 그 제사의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에게 홍수와 같은 재앙을 주지 않고 그 땅에 번창하게 하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를 띄워준다고 기록되어있다. 영화의 엔딩에도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여타의 재난 블럭버스터의 엔딩처럼 희망의 메시지로 읽히지는 않는다.

창조주는 분명 이상적인 인간 세상을 위해 홍수라는 재앙을 일으키고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계획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면서 인간의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을 보았고 방주 안에서 그런 인간들과 남아있는 자신과 가족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벌어진다는 것도 영화는 잘 보여줬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던 신의 계시는 유토피아적 결정이었겠지만 인간이 남아있는 이 땅에 그런 희망이 싹을 틔울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음은 영화의 엔딩에서 보다 극장 밖으로 나가 당면할 현실에서 더욱 명징하게 깨우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메시지가 희망적이지 않아 씁쓸한 것은 어쩌면 영화 탓이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인간이 어떤지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의 계시의 해석

노아는 자신의 계시를 받은 신의 명령을 따르려고 애쓴다. 그러나 혈육을 죽여야 하는 상황 앞에서 갈등한다. 정말 그것이 신의 뜻인지 혼란스럽다.

노아의 할아버지인 무드셀라(안소니 홉킨스)는 자신의 힘으로 불임인 일라를 치유한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본 인간이랄 수 있다. 최후의 순간에서까지 달콤한 베리를 찾고 그것을 입에 넣는 즐거움으로 최후의 고통을 기꺼이 맞는 무드셀라의 모습은 생각할 여지를 준다.

신의 계시라고 여겨지는 메시지의 의미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신의 메시지를 선한 의지로 해석하며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신에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미천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그래도 인간세상에 희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