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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행복한 사전] 살아있는 언어를 채집해 소통의 배를 엮다

 

 

행복한 사전

살아있는 언어를 채집해 소통의 배를 엮다

 

 

1995, 겐부 출판사의 사전편집부. 편집자 아라키(코바야시 카오루)가 병든 아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퇴직하기로 하면서 그의 빈자리를 채울 직원을 찾아 나선다. 사전 한 권 만들어 내기란 적어도 몇 년을 투자해야 하는 작업이고 잘 팔리지도 않기에 출판사 내에서도 찬밥 신세인 사전편집부. 그러다 보니 딱히 그 곳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도, 적합한 사람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던 차, 영업부에서는 영 적응하지 못하는 언어학 전공의 마지메(마츠다 류헤이)를 발견한다. 소극적이고 자기만의 세계에 파고드는 것처럼 보이는 마지메. 하지만 그는 언어적 감각과 차분하고 집요한 성격, 문자와 책에 대한 애착으로 사전편집부의 적임자로 보인다. 평생 사전 편찬에 몰두한 마츠모토(카토 고)는 현재의 사람들이 의미를 변형해 사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단어까지 등록한 사전 '대도호'를 만들고자 한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모으고 그 말의 의미를 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고 서로 잘 알 수 있게 만드는 사전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본질적이면서도 간결한 사전 편찬의 목표는 명확하지만 용어를 수집하고 검토하고 해설을 적고 용례를 적고 다섯 번에 걸쳐 수십 만개의 단어를 정리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것이다.

세상은 언어의 바다이고 사전이란 그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와 같다. 사람들은 사전이라는 배로 그 바다를 건넌다.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해 거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을 위한 배, 그것이 바로 '대도호'라는 사전이."

 

평생을 사전 편찬에 바친 마츠모토 선생이 설명하는 사전 '대도호'는 결국 언어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생존하게 만드는 배와 같은 것이다. 이런 사전 편찬의 목표는 마지메를 움직인다. 그런 사전은 마지메에게 절실한 배였던 것이다. 영업부에서 서툴렀던 것도, 조직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도 결국 마지메가 누군가와 이어지는 것에 서툴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 표현을 담아낼 사전은 험난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든든한 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지메가 사전 편찬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도, 그의 눈빛이 사전 편찬 작업을 하면서 달라진 것도 모두 설득력을 갖게 된다. 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겪으며 마지메 안에 소통의 방법 또한 자라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서먹했던 직장 동료 니시오카(오다기리 조)와 교감할 수 있었고, 하숙집 손녀인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는 힘도 그것에서 나온 것이리라.  

시간이 지나 사전편집부에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낯설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서히 사전 만들기에 몰입하고 애착을 갖게 되는데 이 또한 사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소통의 기능을 깨달아가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머나먼 여정일 것 같았고 도중에 좌초할 수도 있었던 '대도해 편찬'이라는 항해의 끝이 보인다. 장장 15년에 걸친 작업의 끝, 그 사이 많은 것들이 조용히 변화를 맞았다. 감수자였던 마츠모토는 병들었고 마지메는 카구야와 함께 살고 있고 하숙집 아주머니는 돌아가셨다. 마침내 대도해가 완성돼 출간기념회가 열리지만 대도해를 기획하고 오랫동안 사전 편찬에 헌신했던 마츠모토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는 마지메. 하지만 누구도 완성의 때를 확신할 수 없었던 사전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오고 달려왔던 과정이었음을 그들도, 관객들도 느끼게 된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사람과 소통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배의 역할을 할 사전을 만들었던 과정 자체가 그들에겐 항해였고 삶이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교감하고 소통하는 수단이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살아 움직이는 것을 종이 위에 채집한 사전은 그 자체로 생동하는 생명체 같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생명력을 지닌 사전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사전의 의미와 말과 기록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되새길 만하다. 특히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귀감이 될 것 같다. 어떤 의미를 담아낸 책을 어떤 정신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책의 성격에 따라 방법에 차이는 있겠지만 만들어내는 것에 올곧은 정신이 담겨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신입 출판인 뿐만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출판인이 있다면 이 영화 (또는 책)와 슈타이들 전시를 권해주고 싶다.)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영화가 지나치게 교훈을 남기는 방식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한 분야에 집중한 장인 정신, 존재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가치, 고유의 문화나 인간을 향한 예의 등을 차분하게 전달하지만 진부하다는 인상도 남긴다. 사전 편집부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가면서 변화해 가는 모습은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만 후반부에 사전의 완성을 위해 급하게 투입된 보조자들까지 사전 검수 작업에 헌신하는 모습은 작위적으로 보인다.

그런 표현 방식 면에서 일본 영화 <굿' 바이>를 연상시킨다. 일본 장례 문화와 납관사의 장인 정신을 담아냈던 영화는 신참 납관사가 그 세계에 적응하고 계승하게 된다는 점과 주변 인물들의 역할에서 <행복한 사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굿' 바이>81회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행복한 사전> 역시 86회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일본 대표작으로 출품됐으나 <굿' 바이>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굿'바이>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톤과 메시지의 전달 방식이 더 이상 새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행복한 사전> 2012년 일본 서점 대상을 수상한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를 원작으로 한다. 국내 개봉 제목은 원작의 제목인 <배를 엮다> 대신 선택된 제목이다. '행복한 사전' '배를 엮다' 보다 직관적이고 쉽게 다가올 만한 제목일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영화의 제목은 '배를 엮다' 쪽이 더 나았다고 생각된다. '왜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배를 엮다]라는 제목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영화를 보면 해소된다. 그렇다면 '배를 엮다'라는 제목으로 개봉을 할 때 이야기 할 만한 요소도 풍부해지고 그것을 마케팅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하지 않았을까. '행복한 사전'이라는 다소 말랑말랑한 제목으로 바꾸면서 쉽게 가는 길을 택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한껏 진지하게 전달한 메시지에 그야말로 반하는 길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