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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만신] 영화를 보러 갔더니 한판 굿을 보여주더라

 

 

만신 MANSHIN: Ten Thousand Spirits

영화를 보러 갔더니 한판 굿을 보여주더라

 

<만신>'만신'(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 김금화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험난한 만신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고 인간문화재가 된 그녀의 삶을 배우들의 재연과 함께 표현해 내며 무당과 예술인, 굿과 영화의 줄 잇기를 행한다. 터부시됐던 무속에 대한 편견을 거둘 수 있는 생각의 여지를 주고 다큐멘터리 안에 극영화 같은 자유로운 표현법을 드리우며 감독의 예술적 인장을 찍어낸다 

 

만신의 삶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시대는 그런 개인의 숙명을 자기 손에 맞게 휘두른다. 그 휘둘림에 상처받고 고통의 삶을 살았으나 그녀는 그조차도 업보로 받아들이며 한 생을 살아간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 정권의 시대를 관통하며 이념과 필요에 의해 널 뛰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대우를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고 그 속에서도 무속을 유지하고 계승하려 한 만신의 삶, 신명 나는 굿판을 벌이며 복을 기원하기도 하고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원혼을 위로하기도 하는 만신의 삶은 한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 아니었을까. 무당은 굿을 하면서 날이 선 작두 위에 오르곤 하는데 그것은 곧 무녀의 삶을 상징한다는 표현은 그 험난한 삶을 설명한다.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도 아닌 중간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며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수모와 멸시를 견뎌야 했던 만신의 삶은 숙명이 아니라면 따를 엄두를 내지 못할 길이 아니었을까 

 

                                               <10대 유년의 김금화 넘세(김새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무녀는 그것을 표현하고, 연평해전과 천안함 침몰의 바다에서 한을 갖고 죽은 원혼들을 위로하는 살풀이로 진혼제를 한다. 그 행위가 과학적으로 입증할만한 무엇이냐를 논하기 전에 그들의 진혼제는 진정하고 신성해 보인다. 아픔을 위로하고 더 나은 날을 기원하는 것을 터부시할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와 이념을 넘어 그 행위 자체에 유해함이란 없음을, 무엇보다도 진정하고 신성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 굿은 그야말로 신명 나는 한판놀음이다. 굿을 하는 무당은 연극 배우, 오페라 가수 그 이상이라고 표현하는 전문가의 말대로 한판 굿을 하면서 자신의 끼를 표출하는 만신의 모습은 재능이 넘치는 예술인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인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룸살롱이나 파티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뱃사공들을 모아놓고 한판 굿을 하면 굿 이후에 신명 나게 놀아 제치는 것으로 유흥을 대신했다'고 하고 '그 때는 멋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는 우리가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 허전해진다. 영화는 만신과 굿을 자연에 비유하는 시선을 보이고 이에 대비하여 높게 지은 건물과 번쩍이는 도심, 각종 사건 사고로 얼룩진 우리의 자화상을 비춘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의 유산, 자연으로부터 온 것들을 터부시하고 괄시하면서 대신에 얻어낸 것들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소중한 것을 잃고 복잡하게 꼬여만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이패션을 논하지만 진정한 멋은 잃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새만신 김금화(류현경)>

 

<만신>은 다큐멘터리다. 만신 김금화의 인생을 실제 그녀의 모습과 입을 통해 전달한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독특한 점은 김금화의 삶을 세 명의 배우가 재연하는 것과 감독의 표현이 마치 미디어 아트처럼 펼쳐지는 것에 있다.

만신 김금화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드라마틱함이 있어서 극화 하기 좋은 소재로 보인다. 그러하니 그 소재로 장편 극영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터이고 정통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찬경 감독은 큰 틀에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는 작품 안에 인물의 과거 삶을 보여주는 방식을 자료화면이나 주변인들의 구술로 끄집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배우들의 연기로 표현했다. 10대 유년의 김금화인 넘세(김새론), 새만신 김금화(류현경), 70년대 김금화(문소리)와 실제 김금화의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며 하나로 잇는다. 이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 지극히 사실의 전달 또는 재구성이라고 느껴지는 딱딱함을 넘어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실제 인물의 삶을 재연하는 것이 극적으로 보이기 위한 포장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전달되는 것으로 역할 한다는 말이다.

무병을 앓다가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순간, 전쟁과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에 위협을 당했던 순간, 정권의 탄압과 종교계의 비판을 견뎌내며 신명을 펼쳤던 순간 등이 배우들의 재연을 통해 드러나면서 훨씬 이입이 잘 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틀 안에 픽션의 표현력을 가져와 장점으로 활용한 것이 영화를 반짝 빛나게 만든다.

 

                                                       <70년대 김금화(문소리)>

 

감독의 표현력은 만신 김금화의 삶을 훼손하지 않고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짜릿한 예술을 스크린을 통해 만나게 한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깨어있는 시간에도 꿈처럼 환영을 보는 만신의 상태를 감독은 스크린 속에 몽환적인 영상으로 표현하고 영상 시처럼 펼쳐낸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해내는 작가의 모습이 흡사 신명 나게 굿판을 벌이는 만신의 모습과도 닮아 보인다.

 

 

영화의 시작은 만신 김금화의 잘 알아듣지 못할 중얼거림으로 시작한다. 가만히 듣다 보면 이내 그것이 영화를 촬영하는 데 무탈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내용과 영화를 보러 올 관객에게까지 복을 기원하는 굿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무리는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 낡고 못 쓰는 쇠를 그러모으는 '쇠걸립' 시퀀스가 담당한다. 쇠걸립이라는 행위는 낡은 쇠를 모아 굿에 쓰이는 도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마을 사람들의 뜻을 한데 모아 뭉쳐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넘세(김새론)가 세트를 뛰어다니며 쇠걸립을 할 때 영화 속에 등장한 배우들은 현재의 모습으로 각자의 못 쓰는 쇠를 기부한다. 마치 영화의 촬영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한판 굿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영화를 찍는 현장의 시작과 마무리로 보여주고 한판 굿으로 시작해 굿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이 영화가 구성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모습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장면의 끝 암전에 등장하는 천경자 화가의 한 줄은 차분하게 영화를 정리한다. "친구들이 '굿 보러 가자' 해서 갔더니 영화를 틀고 있었다". 이 한 줄은 결국 영화와 굿이 표현하는 것에 있어 서로 다른 길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만신과 배우들의 기능이 서로 다른 길에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천경자 선생의 한 줄을 응용하자면 관객은 "영화를 보러 갔더니 한판 굿을 보여주더라"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