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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아메리칸 허슬] 진실한 삶을 살라는 사기꾼들의 깨우침

 

 

아메리칸 허슬  American Hustle

진실한 삶을 살라는 사기꾼들의 깨우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러 사건들이 있다. 매체에 보도되고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는 그 사건들은 창작자들에게 여러모로 영감을 주기도 한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던 '앱스캠(ABSCAM)'을 소재로 멋들어지게 폼 나는 영화 한 편이 나오게 된 것도 그런 영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앱스캠은 FBI 내 위장 조직으로, 범죄 소탕을 위해 함정을 설계하고 사기꾼(con-man)과 협업을 하거나 가상의 중동 지역 족장을 내세워 뇌물을 주고받은 정치인을 소탕하는 작전 등을 펼쳤다고 한다.   

<아메리칸 허슬>은 앱스캠을 통해 실존했던 사건과 인물을 참고하여 '허슬'이 의미하는 것처럼  한바탕 위장과 사기, 혼잡스런 대소동을 관객들의 눈 앞에 현란하게 펼쳐 놓는다.

 

 

 

어빙(크리스찬 베일)과 시드니(에이미 아담스)FBI에 의해 체포됐다가 석방을 빌미로 정치인 소탕 작전에 뛰어든, 소위 Con-man이라고 불렸던 사기꾼들이었다. 신분을 위장하는 것으로 자신조차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겐 그 믿음을 확신으로 바꿔 등쳐 먹는 사기꾼들은 마치 치밀한 사이비 교주 같다.

생존하기 위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여자의 기운과 자본과 권력 앞에 무기력했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물불 안 가리고 성공을 지향했던 남자의 기운은 최강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5천 달러를 걸고 5만 달러 대출을 꿈꾸는 절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들의 사기 성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범죄 소탕을 위해 위장과 함정 설계가 절실했던 앱스캠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탁한 FBI 조직과 사기꾼들이 부패한 정치인 소탕 작전을 펼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요한 내용인데,  영화는 앱스캠 조직보다는 사기꾼들에게 조금 더 중심을  허락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거짓된 삶이 아닌 진실된 삶'으로 볼 수 있다. 만약 FBI 수사를 중심으로 영화의 톤과 메시지를 설정했다면 이 영화는 CIA 비밀 파일 속에서 찾아낸 실화를 영화로 옮겼던 <아르고> 처럼 공무 수행과 애국심 같은 주제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메리칸 허슬>은 이를 악물고 사기 치던 근성을 지닌 인물들을 영화의 중심에 둠으로써 결과적으로 나도 속이지 않고 남도 속이지 않는 진실된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어빙이 민머리를 가리기 위해 정성스레 가발을 붙이는 장면을 꼼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이 영화가 거짓과 사기를 일삼던 인물을 중심에 두고 그들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지켜보라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악취가 나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매력적이어서 중독적으로 바르게 된다는 영화 속 로잘린(제니퍼 로렌스)의 매니큐어 역시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중요한 소품 역할을 한다. 위장된 거짓 삶도 쉽게 돈을 벌게 만들어 중독을 만든다. 하지만 삶이란 매니큐어로 덧칠하지 않아도 진실함 자체로 은은한 향이 나는 것임을 시대를 풍미한 사기꾼들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고 위장하며 남들을 속여왔던 이들을 중심에 둔 영화는 한바탕 대소동을 통해 결국 이 인물들이 진실된 삶의 가치를 깨닫고 제 갈 길을 찾는 엔딩으로 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아도취에 빠진 듯 당당하고 삶에 열정적이다. 사이비 교주처럼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미친 듯이 함정을 설계해서 실적을 올리려는 수사관도, 온갖 결핍이 응어리져 만들어진 불안이 자기 합리화로 제멋대로 뿜어져 나오는 여자도 모두 당당하고 열정적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에 스파크가 일지 않을 수가 없다. 각각의 캐릭터가 따로 또 같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남다른데 이는 <파이터><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어 어김없이 캐릭터 연출 및 연기 디렉팅에 있어 데이빗 O. 러셀의 능력이 출중함을 인정하게 만든다. 이는 올해 오스카상에서 4개의 연기 부문에 모두 후보 지명되는 것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20kg을 찌웠다는 크리스찬 베일, 미친 듯한 자신감과 집요함으로 무장한 브래들리 쿠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능가하는 정신 없는 여인을 연기하며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제니퍼 로렌스까지 서로 장면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같다.  

 

                

개인적으로는 시드니(사기명 '레이디 이디스 그린슬리')를 연기한 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이 참 흡족했다. 매 영화마다 좋은 연기를 보였고 연기상 후보에도 자주 지명됐으나 메릴 스트립, 와킨 피닉스, 필립 시모어 호프만 등 함께 연기한 배우들을 서포팅 하는 조연으로만 자리매김하는 듯한 인상이어서 아쉬웠던 에이미 아담스가 <아메리칸 허슬>에선 마침내 활개를 치는 당당한 주인공이다. 클럽, 카지노 파티 등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내며 빛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팬심 역시 오랜만에 신이 나는 경험을 했다.

 

 

<아메리칸 허슬>은 뮤지컬은 아니지만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감상을 남긴다. 그만큼 영화는 음악을 타고 음악과 함께 흐른다. 어찌 보면 음악이 과하다 싶을 만큼 매 시퀀스가 음악과 버무려진다. 때문에 음악을 빼면 배우들의 연기만 둥둥 떠다닐 것 같은 감상마저 남긴다.

어빙과 시드니가 처음 만나 서로를 인연이라 느끼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듀크 엘링턴의 'Jeep's blues'를 필두로 엘튼 존, 비지스, 도나 썸머, E.L.O., 톰 존스, 윙스의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한다. 로잘린이 'Live and let die'를 들으며 미친 듯이 걸레질을 하는 장면이나 연인과의 엇갈리는 심정 아래 흐르는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흥에 취해 사기꾼과 타깃이 된 정치인이 함께 부르는 'Delilah'가 흐르는 장면을 보자면 여느 주크박스 뮤지컬과 비교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