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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노예 12년] 평온함과 끔찍함이 뒤섞인 피비린내 나는 기록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평온함과 끔찍함이 뒤섞인 피비린내 나는 기록

 

1841년 뉴욕. 솔로몬 노섭(츄이텔 에지오포)은 손재주 좋은 목수이자 바이올린 연주자로 살아가는 자유인이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하는 남자들의 호의에 집을 떠났던 노섭은 술에 취한 후 납치, 감금된다. 자신은 자유인이라고 아무리 호소를 해봐도 돌아오는 것은 매질 뿐이다. '플랫'이라는 노예명을 얻은 채 뉴 올리언스의 농장으로 팔려 간 노섭은 속수무책으로 노예의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12년의 지난한 시간, 그는 생존하는 것으로 삶을 살아갈 희망을 채워나간다.   

 

 

 

12년의 강제 노예 생활 끝에 가까스로 가족과 만나게 된 솔로몬 노섭이 1853년 그 기록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실화를 영화로 만든 <노예 12>. 바닥보다 더 밑으로 들어가는 인권 문제와 비인간적인 처사들, 법적으로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실제의 이야기는 스크린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그런 고통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일 텐데, 16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런 인권 상황으로부터 얼마나 나아졌는지 생각해보는 데 이 영화의 의의기 있지 않을까. 섬에 끌려가 강제 노동 착취와 폭력의 피해를 당해야 했던 사람의 사건이 충격에 빠지게 했던 것도 얼마 전의 일 아니었던가.   

 

 

 

<노예 12>은 솔로몬 노섭을 중심으로 노예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심리에 관객을 완전하게 몰입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딱히 영화 속에 시간의 흐름을 연도별로 나열하지는 않는다. 노예의 비참한 삶을 사는 노섭의 모습과 납치 되기 전 아내와의 시간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오프닝 시퀀스 또한 시간을 재배치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영화는 하나하나 완결되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노섭이 겪었을 12년이라는 지난한 시간을 꾹꾹 눌러 차곡차곡 관객에게 전달한다. 각 에피소드는 그가 품었던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고 희망을 재로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진다가령, 인간미가 있는 주인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던 순간이나 심부름 가던 길에 도주할 수 있었던 순간이 찾아와도 결과는 한결같이 참혹하다. 어렵사리 종이를 구하고 포도즙으로 잉크를 만들어 쓴 편지도 스스로 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렇게 희망이 꺼져 재로 변하는 답답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관객 역시 노섭의 심리 상태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카메라는 인물과 상황을 거리를 두고 찍거나 근접해서 찍는 두 가지 방식 모두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노예로서 극단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당하는 모습들은 인물과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서 오랫동안 비춤으로써 그 끔찍한 순간이 마치 평온한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보이게 만든다. 끔찍함과 평온함, 상이한 두 감정을 피비린내와 함께 전달하는 냉정한 카메라의 시선에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인물을 클로즈업 한 장면들은 인물(의 눈빛)외에는 달리 볼 것이 없게 만들어 인물의 감정에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것은 스티브 맥퀸 감독의 전작인 <셰임>에서도 어김없이 빛났던 장치였다. <셰임>에서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서 오열하던 마이클 패스벤더의 모습이라든지, '뉴욕 뉴욕'을 맥없이 슬피 부르던 캐리 멀리건의 모습에서 관객이 눈을 뗄 수 없었고 그 감정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노예 12>에서도 답답함과 분노, 슬픔을 가득 담은 츄이텔 에지오포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여러 장면, 특히 후반부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되기 전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인물을 클로즈업하며 관객을 감정에 몰입시키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