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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블랙 스완]흑조까지 되고싶어 미쳐가는 백조



보기만 해도 아찔한 놀이기구가 있다. 수십미터 상공으로 올라갔다가 어느 순간 출발지로 떨어져버리는 그 놀이기구를 바라만 보다가 순간의 짜릿함이 어찌나 대단하길래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타는지 궁금해진다. 한편으로는 내가 저 놀이기구를 타고 온전히 즐길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스럽고 괜한 도전정신을 빙자한 오기가 생겨서 한 번 타보기로 한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은 은근히 기대를 불러오고 손에는 땀이 나고 아드레날린이 서서히 솟구칠 준비를 한다. 그 절정의 순간의 맛이란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드디어 카운트다운과 함께 정상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놀이기구. 그런데 정상에 올라간 이 기구가 땅으로 벌써 쏜살같이 추락해버렸어야 할 때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는, 기구는 공중에 떠있다. 그렇다, 나는 갑자기 고장나버린 놀이기구 안에 있다. 아니 갇혀있다. 아랫동네와는 달리 조금은 강하고 낯선 바람을 맞으며 그에 흔들리는 기구 안에서 나는 불안에 떨고 있다. 이건 더 이상 놀이기구가 아닌 감옥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그 때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예상했던 그 모양이 아닌 좀 더 위험한 모습으로 내동댕이쳐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그림이 상상이 되면서부터 이건 생지옥으로 돌변한다. 영화 <블랙 스완>의 스완퀸 니나(나탈리 포트만)은 이 고장난 놀이기구 안에 타고 있는 와 같은 상태다. 그리고 관객은 그 놀이기구를 같이 타고 있거나 아니면 그 불안한 니나를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된다. 두 입장 모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더 심한 쪽은 바스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다.


<블랙 스완>은 니나의 아름다운 백조 공연으로 시작한다. 환청처럼 관객의 환호도 들리는데 그건 니나의 꿈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로 열연을 하며 프리마돈나가 된 자신의 모습을 꿈에서 본 니나.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닌 현실이 된다. 물론 순순하게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아닌 다른 모습을 보인 후에야 그 역을 따내게 된다. 하지만 애초 그 역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그 배역으로 인해 그녀는 점점 이상해진다. 캐스팅 할 때부터 백조로서는 완벽하지만 흑조로서는 나무토막보다도 못하다고 평가한 감독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이 못마땅하고 수치스러우며 사방에는 자신이 맡은 배역을 시기하고 언제라도 빼앗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뿐이다. 심지어 왕년에 발레리나였던 어머니마저도 그녀에게는 적처럼 느껴진다. 과연 니나는 이 모든 악조건을 딛고 백조와 흑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진정한 스완퀸이 될 수 있을까.


니나는 약하지만 나탈리 포트만은 강하다 / 니나는 틀렸지만 나탈리 포트만은 옳았다

니나는 성실하고 테크닉도 훌륭한 발레리나다. 충분히 장점이 많은 댄서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싶어한다. 흑조를 감당할 수 없다면 애초에 스완퀸이 되려는 마음을 단념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간과하고 욕망에 큰 힘을 싣는다. 하지만 니나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다. 오디션을 할 때도 사소한 것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배역을 요청하러 감독을 찾아갔을 때도 소극적이며, 수시로 울먹인다. 배역을 따냈다는 놀랄만한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화로 전달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기쁨을 드러내지 못한 채 화장실에 몰래 숨어 전화를 하고 어김없이 울먹인다. 이리도 여린 댄서가 감히 흑조를 소화하겠다고 덤빈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잔을 들이마신 순간부터 그녀는 서서히 미쳐간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하는 척 할 수는 있고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 뒤에서 수많은 것들이 뒤틀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건 어떤 일에나 적용될 수 있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그 어떤 상황에서든 말이다. 이건 할 수 있다정신의 도전과는 다른 것이다. 도저히 내가 아닌 옷까지 입고 내가 아닌 것까지 하면서 뭔가를 하려는 것은 만용이고 과욕이다. 이런 욕망을 누르지 못하고 덤비는 것은 인간 승리를 일궈낸 수많은 도전과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도전 앞에 무모한이 붙는 것은 그냥 도전과 성격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쯤에서 배우 나탈리 포트만에 대한 놀라움을 표해도 좋을 것 같다. 보는 사람까지 함께 미쳐버릴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저 배역을 할 생각을 하고 소화해내고 감당해낸 배우의 힘과 노련함에 경탄한다. 이 역할을 하기로 하고 소화해낸 것이 그녀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면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배우 나탈리 포트만도 부서져버렸을 것이다. 연기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캐릭터를 자기 안에 담아서 표현할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너져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조커역의 암울함을 감당할 수 없어 우울증에 시달렸다던 히스 레저나 배우도 함께 시나리오를 완성해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감독의 말에 혹해 출연했다가 그 후 배우로서 활발하게 활동도 못하고 평생 후회할 짐을 안고 살아야 했다고 고백했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의 예를 보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대중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배역을 위해 애쓰다가 부서져버리는 니나를 스스로 부서져버리지 않고 감당해낸 배우 나탈리 포트만에게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어찌 보면 니나에게선 나탈리 포트만을 전세계에 알린 영화 <레옹>에서의 마틸다와도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다. 한없이 어린 소녀가 가족이 킬러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걸 목격하게 되고 한참 나이가 많은 킬러를 의지하게 되는 마틸다 역시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을 만난 어린 소녀다. 마틸다는 다행히도 소녀의 발랄함과 레옹의 도움으로 그 현실을 감당하며 살아내기는 한다만 총을 들면서 울먹이는 그 소녀의 모습은 한없이 연약해 보인다. 그리고 그 마틸다의 연약한 울먹임을 니나에서 또 한 번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 캐릭터와 유사한 이미지를 지닌 캐릭터를 <블랙 스완>에서 연기한 것이다. 극 안에서 캐릭터가 맞이하게 되는 최후는 다르지만 배우로서 나탈리 포트만은 어쩌면 자신의 마틸다 이미지와 유사하게 출발하고 결과적으로는 역할을 감당해내려고 애쓰다가 부서져버리는 캐릭터를 보여줌으로써 연약한 이미지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 범위 안에서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할 수 있는 것을 보란 듯이 다 해 보이고 관객은 그 배우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에 배반당한 기분을 가질 새도 없이 그 열연에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게 된다. 그러니 이 배우의 선택은 옳았다.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해내려고 미치도록 애쓴 니나는 틀렸지만 겉보기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누구보다 그녀에게 어울렸던 캐릭터를 알아채고 낚아챈 나탈리 포트만은 옳았다. 아카데미도 그녀의 현명함에 몰표를 주지 않을까.


기승전결로 보자면 이 영화는 잠깐의 를 넘긴 이후부터 내내 강도 10중에 8 이상을 유지하며 까지 이른다. 이 완급조절 안 해주는 불친절한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온 몸에 전율을 그리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어떻게든 관객이 니나의 심리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면 안되기 때문에 카메라도 늘 그녀에게 딱 달라붙어 다닌다. 그녀의 뒤통수를 바짝 따라가던 카메라도 뒤이어 바로 그녀의 정면 클로즈업으로 연결되는 장면이 두어번 나오는데 마치 니나가 뒤따라오는 카메라를 휙 돌려 자신의 얼굴 앞에 갖다 대고 나만 찍으라고, 정면에서!’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뒷모습은 니나일 때고 앞모습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존재는 니나 안에 있는 흑조의 몫이었을테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편안하게 볼만한 영화가 아니다.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백조의 호수> 초연의 밤, 공연의 막과 막 사이 점점 쇠약해지고 날카로워지는 니나의 상태가 맞닥뜨리는 사건들을 하나의 공연을 보면서 함께 경험하게 되는 관객은 말 그대로 우아한 백조가 물 위에 떠있기 위해 물 속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세밀하게 바라보는 심정이 된다. 그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측은하고 슬프기까지 한 그 끝에서는 멍해질 것이다. 장담하건대, 이 영화 충격이 만만치 않을 거다.

 

사족>

어제 뉴스에서 국립발레단의 <지젤>공연이 전회 매진이 됐다며, 순수 예술계에서 보기 힘든, 발레 공연에서 50여년 만에 나온 매진이라며 놀라워하는 걸 봤다. 오늘 영화 시작 전에 문득 이런 망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레 하는 영화가 잘 된 적이 없다. 그러니 발레 하는 영화에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오게 하기 위한 여론 조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곧 다가올 발레 공연의 티켓을 모두 사서 전회 매진이라는 초유의 현상을 만들고 그걸 뉴스에 내보낸다면 대중은 발레에 대해서 좀 더 편안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영향이 며칠 후 개봉할 발레 하는 영화에도 미쳐 대중의 마음을 열게 하지 않을까 하는 계산을 영화사에서 하지 않았을까. 발레 티켓을 사는 비용을 마케팅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그 돈으로 영화 예매권을 사서 예매순위를 높이는 것보다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할 만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닌 나의 망상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쯤 되면 나도 미쳐가는거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