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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silver screen

[써니] 추억의 종합선물세트, 그 시절의 써니와 현재의 써니 모두에게 전하는


<써니>1986년 서울의 한 여고를 다녔던 일곱 명의 친구가 25년 뒤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80년대의 추억과 현재를 오가며 늘 함께였던 그 시절에 간직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되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7명의 소녀는 소위 7공주파로 학교를 주름잡는 언니들이었고 인근 학교의 일진들과 패싸움을 하기도 하는 노는 소녀들이었다. 공부보다는 함께 어울려 노는 걸 즐겼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그들의 시간. 그 때를 즐겼던 그들의 우정과 의리 그리고 질투가 뒤섞이고 이들과 대립하는 무리들과의 폭력이 빚은 갈등이 그 찬란한 시절에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를 보여준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엄격한 학교의 분위기는 양념처럼 뿌려져 있다.

사실 새로울 것은 없는 그 시절 여고생들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 몇몇이 함께 버무려진 영화에 대해 이야기의 참신함을 평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대신 2011년에 끄집어낸 그 추억의 앨범을 보는 재미는 즐길 필요가 있는 영화다. 그야말로 여고 7공주파의 추억을 빌려 떠나는 추억 여행이라고 할 만하고 80년대 추억의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만하다. <친구> 등의 영화를 통해 보였던 남학생들의 비극적인 추억이 아닌 여고생들의 발랄한 추억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임에도 신선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점심 시간이 시작됨과 함께 학교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매점에선 서로 빵을 사겠다고 전쟁이 일어나고 노는 친구들이 그 순간을 리드하는 장면들을 보자니 마치 학창시절에 책상 위로 뛰어다니며 노는 여고생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과거의 한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가 보여주는 80년대 여고생들의 모습은 관객들의 과거 추억과 조우하며 친근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교복자율화여서 교복은 안 입었지만 누구 하나 빼놓을 것도 없이 나이키 스포츠백과 디스코바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그 시대의 모습,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적은 엽서를 보내고 유선 전화기의 선을 길게 늘여 전화기를 방에 들고 들어와 밤새 친구와 수다를 떠는 풍경 등은 그 자체로 80년대의 학생들의 문화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7공주파의 이름을 써니로 지어주는 장본인도 심야 라디오의 인기 DJ였던 이종환 아저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80년대로 돌아간 것처럼 눈 앞에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을 추억에 젖게 하는 영화는 음악과 패러디로 관객을 웃기기도 한다. Joy‘Touch by touch’에 맞춰 몸싸움을 벌이는 전경과 시위대 그리고 써니들의 모습, Richard Sanderson‘Reality’를 그 노래가 흘렀던 영화 <라붐>을 패러디한 CF를 또다시 패러디한 장면 등은 영화의 설정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들과 친숙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심지어 배우 유호정의 입에서 나오는 암환자라는 대사는 그 유명한 아만자가 뭐에요유머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배우의 이미지부터 노래와 시대를 상징하는 소품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영화는 자신이 지닌 대중적 매력을 과시한다.

또한 예전의 스타들을 오랜만에 만나보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오랜만에 보는 진희경, 홍진희, 이연경의 모습도 그렇지만 이경영과 윤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두 배우는 그야말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청춘 스타였다. 그 시대의 스타들을 그 시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이 영화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영화가 주는 복고 향기에 정점을 찍는 것과 같다. 특별출연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모습을 보인 이들은 진정 영화 속에서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듯 80년대에 대한 추억의 상자를 열게 하는 영화의 성격 때문에 이 영화는 친구들과 왁자하게 팝콘을 먹으며 수다 떨면서 보기에 적절한 영화가 된다. 저런 장면이 나올 때 옆에 있는 사람과 바로 바로 공감을 확인하고 나눌 수 없다면 입이 근질근질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고등학생 시절 또래 집단 내에서의 갈등의 실상을 비추기도 한다. 주인공이 7공주파이다 보니 아무래도 여고생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과 그 폭력을 보게 된다. 써니의 리더 하춘화를 연기한 강소라의 발차기는 단연 압권이다. 그 유명한 면도칼 씹는 여고생들의 폭력과 아름답던 시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깨진 병의 날카로움도 보게 된다. 학교에 없다면 그 집단 속에 없다면 잘 모를 수 있지만 그 영향이 꽤 큰 폭력의 실상들 말이다. 이제 중년이 된 나미의 딸이 학교에서 집단 폭력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통해 그 내부 집단의 갈등과 폭력이 과거나 현재나 여전함을 표현한다. 교복을 입어본 적이 없던 시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미는 딸의 교복을 입어보기도 하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교복 입은 여고생들을 보면서 추억에 젖기도 한다. 어쩌면 그 시절이 아름답고 찬란하다는 것을 모르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 시절을 사는 여고생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그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는 데 머물지 않고 그 때의 꿈을 잊지 않고 계속 꿈꾸며 살자는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이 영화를 보게 될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도 향하는 메시지가 된다. 그 때는 모르고 지나버릴 수 있지만 정말로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 시기의 가치를 알고 좀 더 즐겁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보내길 바라는 것 또한 이 영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영화 <써니>의 최대 장점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장면의 유연함에 있다. 공간은 그대로인 채 카메라가 패닝하면서 현재에서 과거로 자연스레 이동한다. 딸을 미행하다가 골목에 숨었던 중년의 나미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10대의 나미가 되어 80년대의 거리를 걷는다. 분명 기술의 힘을 빌렸을 장면 처리임에도 기계적인 맛이 나는 게 아니라 왠지 아날로그의 맛이 나는 것도 영화와 적절하게 잘 어울린다. 1986년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그 시대를 표현하는 간판이나 거리 풍경이 익숙함과 동시에 저것은 세트라는 인상이 확실하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영화를 정겹게 포장하는 힘이 있으니 이런 점도 영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유쾌한 장례식 장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였다. 써니의 리더였던 하춘화의 장례식장에서 써니 멤버들이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하지 못했던 그 공연을 유쾌하게 펼친다. 고등학생 때 꿨던 그 꿈이 시간이 흘러 현실 속에서 희미해졌을 수 있지만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게 된 써니들의 신나는 공연은 장례식 장면도 이렇게 유쾌할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함과 함께 감동의 눈물과 유쾌한 웃음을 함께 선사한다.

영화의 초반, 병원에 입원한 나미의 어머니는 병실에 있는 다른 아줌마들과 함께 연속극에 빠져있다. 연속극은 그야말로 막장 스토리에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아줌마들은 뻔한 설정에 어쩜 저러냐고 탄식하면서도 거기에 빠져서 산다. 이 웃음이 터지는 설정은 이 영화도 이렇게 뻔할 수 있으니 트집 잡지 말고 본질을 봐달라는 감독의 장난스런 부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그렇게 뻔하게 되풀이되는 게 아줌마들의 일상인 것 같지만 그 또한 여전히 꿈꿀 수 있는 인생임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한다. 마흔 살이 넘어 써니 멤버들을 다시 찾아 만나게 되고 다시 한 번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아 다시 꿈을 찾아가게 되는 써니들처럼 말이다.  

강형철 감독은 <과속 스캔들>에 이어 다시 한번 대중이 즐겁게 볼 수 있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따뜻한 봄날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수다 떨면서 보기 좋은 영화, 벚꽃 길을 걸어도 옛 생각이 나는 봄날에 즐기기 제격인 영화다.